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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양향교를지으신,홍시술!!(남양홍씨중랑장파21세대종손이시다!!
어풍대08
2011. 11. 2. 11:19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지방에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으로 서당이나 서원과 함께 유학정신을 꽃피웠던 지방교육의 산실이다. 특히 지방의 인재 육성을 위해 설치됐던 향교는 오늘날의 중등교육기관에 해당되며,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했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교화정책으로 지방민을 교육·교화를 담당할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392년(태조 1)각 도의 안렴사(지방장관)에 명해 향교가 만들어져 운영이 잘되는 여부에 따라 지방관의 평가 기준이 될 정도로 강력한 진흥정책에 힘입어 성종때는 모든 군과 현에 향교가 설치됐다.
향교에는 일반적으로 유생들이 학문을 배우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맨 앞에 배치되고, 그 좌우로 지금 기숙사와 같이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했다. 명륜당 뒤에는 공자와 선현의 위해 봉안과 제례를 위한 대성전과 대성전 좌우에 동무, 서무가 마주하고 있다. 이는 향교가 제례와 교육기능을 담당해 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향교에서는 소학, 사서, 오경이 중요한 학과였으며, 그 외에 근사록 제사(諸史)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고을 수령과 관찰사가 향교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는 제도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 와서 향교가 쇠퇴하자 사림양반이 중심이 되어 세우기 시작한 사학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이 향교의 교육기능을 대신하게 되고, 향교는 제사기능 위주로 운영되어 오다가, 1894년(고종31년) 갑오개혁 때 과거 제도의 폐지와 함께 교육기능을 완전 상실하고 단지 문묘에 대한 제사기능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우리 지역에 향교가 보급된 것을 두고 1983년에 발간된 광양군지나 지난해 수정·보완해 보급된 광양시지, 문화재청, 그리고 각종 자료 등을 검토해 보면 이들 모두 각기 나름의 추정을 하고 있어 정확한 건립연대가 언제인지 불분명하다. 광양시는 차제에 충분한 논의를 거쳐 광양향교의 건립 년대를 일원화해 혼란이 일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다음은 광양향교를 소개한 글들이다.
문화재청은 시도유형문화재 제111호인 광양향교에 대해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세조 25년(1443)에 세운 광양향교는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5년(1613)에 군수 남대원과 지방 유림이 힘을 모아 대성전을 지으면서 점차적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없어진 것을 1966년에 출입문인 풍화루를 돌기둥으로 대신하여 세운 것을 시작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풍화루·동재·서재 등이 있다. 앞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을 두고, 뒤쪽에 대성전 중심의 제사공간을 이루는 일반적인 배치형식과는 달리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책·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걸쳐 제사만 지낸다. 이곳에는 전라남도 향교 중 비교적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광양군지는 1398년(태조 7년) 각도 안찰사에게 주·부·목·현(州·府·牧·縣)에 향교를 창건토록 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광양향교도 이즈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향교의 위치나 규모에 대해 1924년 간행된 ‘희양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광양군지는 또 ‘광양향교는 창건 200년 선조때 왜란의 병화로 건물이 모두 소실돼 15년뒤인 1613년(광해 5년)당시 군수였던 남래원이 군내 유림들과 협력해 우선 대성전을 중건하고 년차적으로 여타건물을 재건했다. 그후 수백년동안 유지해 나왔으나 오랜 연륜으로 건물이 노후돼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1966년 공화현 군수와 정용재 전교 등이 풍화루를 돌과 기둥으로 대체중건했다. 또 1977년에는 주정록 전교 등이 힘을 모아 명륜당 중건을 비롯,동서재 보수와 대성전 및 풍화루의 단청 공사를 마쳤다.’ 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반해 광양시지는 광양향교는 15세기 전반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 1817년(순조 17)에 김영한이 지어 광양군지(일제 강점기 편찬)에 수록된 대성전중건상량문(大成殿重建上樑文)에 병(丙)년에 창설을 시작해 정(丁)년에 완성하니, 인(仁)과 의(義)를 문로(門路)로 삼아 일향의 선비들이 여기에서 학업을 연마했다는 것을 근거로 1397년(태조 5)정축년에 완성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후 광양향교는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7년 광양읍이 왜구에 의해 건물 전체가 소실돼 관련기록도 없어 이전의 상황을 알 수 없다. 다만, 전란이 끝나고 10여년이 지난 1612년(광해군 4)8월, 현감 이오가 부임해 향교를 건립하고 아사(衙舍 관아의 건물)또한 건립했다고 소개하면서 대성전중건상량문의 예를들며 1613년 현감 이오가 향중사림의 협력을 받아 중건했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선 듯 이해하기 힘든, 설득력이 떨어짐을 쉽게 알 수 있다. 문화재청과 광양군지 등은 광해군 5년(1613)에 군수 남대(래)원과 지방 유림이 힘을 모아 대성전을 지었다고 돼 있지만 ‘남래원’이라는 현감과 군수는 광양시 역대 현감과 군수 명단,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가공인물일 뿐이다. 1613년 당시 광양 현감은 남래원(?)이 아니라 홍시술(1613년 3월~11월)이다.
광양시지는 또 ‘대부분의 연구를 보면, 현감 남래원이 중건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남래원’은 사람이 아니라 남쪽으로 부임해와 곧 중건에 착수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광양향교를 중건한 이는 남래원이 아니라 현감 ‘이오’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 또한 앞뒤가 맞지않음을 알 수 있다. 1613년(광해군 5)에 부임한 현감은 ‘이오’가 아니라 ‘홍시술(1613년 3월~11월)’이기 때문이다. 현감 ‘이오’는 그해 1월에 이임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대성전중건상량문의 주인공은 지금까지 정설로만 여겨진 ‘남래원’도, ‘이오’도 더더욱 아닌, 현감 홍시술로 모두 고쳐야 할 것이다.
광양향교의 건축구조와 역대 전교
향교는 지역민을 교육하고 교화하는 장소이전에 ‘문묘’라고 하는 제사영역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로서 의미가 컸다. 문묘는 전통적인 유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로 향교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격식을 갖춘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가 함께 자리해 형성된 구역이다.
그러나 광양향교는 지난해 안타깝게도 본래의 대성전 모습을 잃었다. 광양시가 대성전 지붕의 기와 교체작업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노후된 건물 내부 기둥과 대들보 등이 기와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금이가거나 침하돼 현재 제구실을 못하고 중건을 준비 중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86년 광양향교 현황을 보면 당시 송만수 전교가 △대성전 건물이 많이 낡아 보수가 시급하고 주위 뜰방이 허물어져 개축이 시급함 △명륜당 건물역시 마찬가지며 △풍화루 좌우 장원이 허물어져 보수 시급 △창고가 퇴폐돼 신축 시급 이라고 전남도에 보고했다.
**홍시술,조선순충분의개국공신,자헌대부,호조판서,집현전대제학,남양군,문경공
홍길민의9대손으로,임진왜란때.평안도조도사로활약하시다가.전주부윤을거쳐,
전라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로계시면서,이순신을지휘하였고,정유재란이발발하자,선조의命으로~다시평안도조도사로활약하시다가,등에입은상처로순직하신,
호성선무원종공신1등에작록되신,唐城府院君,忠憲公諱世恭할아버님의외아드님으로
선조경진,1580년7월27일생하셔서,계묘에무과에드신후,수문장,등여러요직을거쳐
1613년3월에광양현감에부임하셔서,8개월만인)1613년11월7일,광양임지에서.서세하셨다
이에,上(광해)께서,時術公의考位,忠憲公과公의어머니高靈朴氏의순절을아시는지라~
애통해하시며,참판으로증직하시고,寧源君에封하셨다.
출처 : 남양홍씨(당성)중랑장파종친회
글쓴이 : 홍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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