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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양군파....도열공,남양군,諱경주할아버님에대한자료!!!!

어풍대08 2011. 2. 15. 19:56

남양홍씨남양군파세보(2003.9발간) 1권에 수록된 유사록중

남양홍씨시조고려개국공신태사공

휘은열(殷悅)후19세 경주(景舟)1460?-1521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제옹(濟翁)이고 지중추부사 당은군 휘 임(任)의 둘째 아드님이고 중종의 후궁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이다.

1483년 성종14년(成宗14)식년 진사(進士)과거시험에 급제하고 1501년 연산군7년(燕山君7)식년 문과(文科)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홍문관정자 (弘文館正字)를 거쳐 1504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 되었다.

연산군이 국정을 어지럽혀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1506년 9월2일 공은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지중추부사 박원종, 부사용 성희안,이조판서 유순정과 함께 반정을 도모할 때 병력동의 책임을 맡아 반정을 성공시켰는데 반정후에 공은 정국공신 1등(靖國功臣1等)에 책록되고 남양군에 봉해졌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중종의 신임이 두터워 도승지에 오르고 픔계는 정2품자헌대부(正2品資憲大夫)가 되었다. 1507년(중종2)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전산군에 봉해진 이과(李顆)가 불만을 품고 모반의 음모를 세웠는데 이를 잘 처리한 공로로 다시 정란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병조판서에 올라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여 경연에서 국사를 논하였다. 그뒤 판중추부사, 호조판서, 좌참찬, 대사헌, 숭록대부 좌참찬, 공조판서, 좌찬성이 되어 중종6년 이후에는 국가원훈의 위치에서 정치전반을 살피는 원로정객으로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국가의 중대사를 독대하여 자문했는바 특히 북쪽의 야인과 남쪽의 왜적에 대한 대비방어책과 흉년으로 굼주리는 함경도 백성들의 구호 그리고 남쪽 어민들의 생계대책 등 국방과 민생안정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때 대사헌 조광조 등 사림들이 정부 요로에 대거 등용되어 훈구세력을 비판하자 훈구세력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특히 중종14년(1519년기묘)10월부터는 정국공신중 폐주 연산의 총신(寵臣)이었던자, 뇌물로 정한 자. 환관, 주동자의 자제등 문제가 있다고 지목한 76명의 삭훈(削勳)을 집요하게 주장하자 중종은 이러한 조광조 등 사림의 집요한 삭훈주장이 자신의 정치기반까지를 파괴하려는 욕구로 받아들여 비밀리에 공을 불러

중종의 왕위 정통성까지 뒤 흔든다는 밀지(주:내용의 대략은 “정국한 신하는 다 도와서 추대한 공이 있는데 지금 4등을 공이 없다하여 삭제하기를 청하니 이는 반드시 그 사람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그런 뒤에 공적이 있는 사람을 뽑아내어 연산을 마음대로 폐출한 죄를 논한다면 경 등이 어육이 되고 다음에 나에게 미칠것”이라 하였다.)를 써주면서 너무 지나친 사습(士習)을 바로 잡도록하여 대사헌 조광조는 유배되었다 사사(賜死) 되고 대사성 김식(金湜)은 자결하는 등 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하는바 왕조실록 중종14년(1519년)11월16 ~ 18일 기록에 보면 공은 지나친 처벌을 반대하였고 사림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사습의 잘못을 논하여 바로잡고 이들을 구제하려면 미리 가볍게 죄주어 다치지 않게 하려고 판중추부사 김전과 예조판서 남곤 그리고 영의정 정광필에게 임금의 뜻을 알리고 의논하였다고 되어 있다. 같은 해11월25일에 판중추부사 남양군에, 다음해(1520년) 4월13일에 좌찬성에, 다음해(1521년)3월13일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6월 20일에 병환으로 졸하시니 나라에서 2일간 조회와 저자를 폐하여 애도하였으며 도열(度烈)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상독정부락)산 16번지에 계시고 불천지위 위패(不遷之位 位牌)와 영정(影幀)은 송능리 43번지에 엣날부터 지어져 수호해 온 별묘(別廟)에 모셔져 있으며 문중에서 매년 춘추(봄 한식,가을 음10월 둘째 일요일) 로 시제를 올리고 있다.

출처 : 남양홍씨(당성)중랑장파종친회
글쓴이 : 홍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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