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집(開巖集),
형태서지 |
권수제 |
개암선생문집(開巖先生文集) |
판심제 |
개암선생문집(開巖先生文集) |
간종 |
목판본 |
간행년 |
1772년경 간행 |
권책 |
연보(年譜), 원집(原集) 4권 합 2책 |
행자 |
11행 21자 |
규격 |
23.0×18.0(cm)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소장도서번호 |
古3428-412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속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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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명 |
김우굉(金宇宏) |
생년 |
1524년(중종 19) |
몰년 |
1590년(선조 23) |
자 |
경부(敬夫) |
호 |
개암(開巖) |
본관 |
의성(義城) |
특기사항 |
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인. 정복현(鄭復顯), 유성룡(柳成龍) 등과 교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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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기사전거 : 行狀(權相一 撰), 墓碣銘(李埈 撰), 金希參遺事(金宇顒 撰, 東岡集 卷17), 義城金氏大同譜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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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력 |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중종 |
19 |
1524 |
갑신 |
嘉靖 |
3 |
1 |
10월 4일, 星州 沙月谷里에서 태어나다. |
중종 |
37 |
1542 |
임인 |
嘉靖 |
21 |
19 |
南陽洪氏 洪胤崔의 딸과 혼인하다. |
명종 |
1 |
1546 |
병오 |
嘉靖 |
25 |
23 |
가을, 監試에 합격하다. |
명종 |
2 |
1547 |
정미 |
嘉靖 |
26 |
24 |
봄, 東堂試에 합격하다. ○ 10월, 장자 金得可가 태어나다. |
명종 |
7 |
1552 |
임자 |
嘉靖 |
31 |
29 |
進士試에 장원하다. |
명종 |
8 |
1553 |
계축 |
嘉靖 |
32 |
30 |
三陟 府使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가다. |
명종 |
15 |
1560 |
경신 |
嘉靖 |
39 |
37 |
9월, 부친상을 당하다. |
명종 |
17 |
1562 |
임술 |
嘉靖 |
41 |
39 |
11월, 尙州 開巖 곁에 別墅를 짓고 ‘開巖’으로 호를 삼다. |
명종 |
20 |
1565 |
을축 |
嘉靖 |
44 |
42 |
8월, 僧 普雨를 탄핵하는 소를 올리다. ○ 9월, 차자 金達可가 태어나다. |
명종 |
21 |
1566 |
병인 |
嘉靖 |
45 |
43 |
10월, 別試 文科에 합격하다. ○ 柳成龍, 吳澐, 文益成과 道義之交를 맺다. |
명종 |
22 |
1567 |
정묘 |
隆慶 |
1 |
44 |
1월, 검열이 되다. ○ 주서가 되다. |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45 |
5월, 모친상을 당하다. |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47 |
가을, 대교, 봉교가 되다. ○ 12월, 李滉을 곡하다. |
선조 |
4 |
1571 |
신미 |
隆慶 |
5 |
48 |
전적, 예조 좌랑, 병조 정랑, 지제교가 되다. |
선조 |
5 |
1572 |
임신 |
隆慶 |
6 |
49 |
헌납, 사간이 되다. |
선조 |
6 |
1573 |
계유 |
萬曆 |
1 |
50 |
정언, 지평, 부수찬이 되다. |
선조 |
7 |
1574 |
갑술 |
萬曆 |
2 |
51 |
지평, 교리가 되다. |
선조 |
8 |
1575 |
을해 |
萬曆 |
3 |
52 |
수찬이 되다. |
선조 |
9 |
1576 |
병자 |
萬曆 |
4 |
53 |
봄, 교리가 되다. |
선조 |
10 |
1577 |
정축 |
萬曆 |
5 |
54 |
지평, 장령, 집의, 검상, 사인, 응교가 되다. |
선조 |
11 |
1578 |
무인 |
萬曆 |
6 |
55 |
부수찬, 부교리, 교리, 집의, 사복시 정, 응교가 되다. ○ 9월, 동부승지, 좌부승지가 되다. |
선조 |
12 |
1579 |
기묘 |
萬曆 |
7 |
56 |
가을, 대사간, 병조 참의, 예조 참의가 되다. |
선조 |
14 |
1581 |
신사 |
萬曆 |
9 |
58 |
4월, 대사성이 되다. ○ 9월, 탄핵을 받아 파직되다. |
선조 |
15 |
1582 |
임오 |
萬曆 |
10 |
59 |
봄, 충청도 관찰사가 되다. ○ 6월, 「寓庵集」 발문을 짓다. |
선조 |
16 |
1583 |
계미 |
萬曆 |
11 |
60 |
봄, 예조 참의, 형조 참의가 되다. ○ 4월, 대사간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5월, 장례원 판결사가 되다. ○ 6월, 부제학이 되다. ○ 가을, 靑松 府使가 되다. |
선조 |
18 |
1585 |
을유 |
萬曆 |
13 |
62 |
開巖으로 돌아오다. |
선조 |
19 |
1586 |
병술 |
萬曆 |
14 |
63 |
가을, 柳成龍이 찾아오다. |
선조 |
20 |
1587 |
정해 |
萬曆 |
15 |
64 |
여름, 聖節使가 되었다가 체차되다. ○ 가을, 光州 牧使가 되다. |
선조 |
22 |
1589 |
기축 |
萬曆 |
17 |
66 |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다. ○ 11월, 己丑獄事에 연루되어 會寧으로 유배 가는 동생 金宇顒을 榮川까지 전송하다. |
선조 |
23 |
1590 |
경인 |
萬曆 |
18 |
67 |
1월 11일, 開巖 別墅에서 졸하다. ○ 4월, 開巖 동쪽에 장사 지내다. |
영조 |
6 |
1730 |
경술 |
雍正 |
8 |
― |
尙州 涑水書院에 봉안되다. | 기사전거 : 年譜, 行狀(權相一 撰), 墓碣銘(李埈 撰)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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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및 간행 |
저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동생인 東岡 金宇顒과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저자의 유문은 6대손 金景濂(1660~1729)이 산일되고 남아 있던 詩文을 裒集하고, 또 선현들의 문집 중에서 수창한 시편 및 家牒에 기재된 것을 뽑아 보충하였다. 1724년 金景濂과 5대손 金汝鎔(1662~1735)이 주체가 되어 교감해서 1729년에는 상, 하권으로 편차가 이루어졌다. 이것을 가지고 李光庭에게 교정을 부탁하고 서문을 받았으며, 김경렴의 아들 金國采(1688~1751)가 權相一에게 행장을 부탁하는 등 준비 작업을 하였으나 간행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후손들이 권상일이 1758년에 지은 행장, 李象靖이 1772년에 지은 復享文까지 수록하고 연보를 추가하여 1772년경 4권 2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규장각(古3428-412),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844),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서각(4-5722, D3B-667),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29),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6대손 金景濂이 蒐集 編次하여 李光庭의 訂正을 받은 2권에 行狀, 復享文, 年譜 등 부록을 증보하여 1772년경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李光庭 撰), 識(金汝鎔 撰), 行狀(權相一 撰)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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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
본집은 年譜, 原集 4권 합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 李光庭이 지은 서문, 年譜,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詩(15), 賦(5)이다. 몇몇 시에는 「海東樂府」, 「德溪集」 등 출전을 밝혀 놓았고, 次韻과 原韻을 첨부해 놓았다. 〈書西行日記後以自譏〉는 〈서행일기〉를 짓고 나서 지은 것으로 漢 成帝 때 尙方劍을 빌려 간신을 처벌하기를 청한 朱雲의 고사를 빌려서 자신을 스스로 기롱한 것이다. 〈題二樂亭〉은 대사간으로 있을 때 醴泉에 있는 文經濟의 二樂亭에 유숙하며 감회를 읊은 것이다. 만시는 曺植, 柳仲郢, 柳希春, 吳健, 盧禛에 대한 것이다. 賦 중에 〈竹西樓賦〉는 三陟의 죽서루를 유람하고 五十川 등 주변 경관을 읊은 것이다. 〈不誠無物賦〉는 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桓山四鳥賦〉는 환산의 네 마리 새가 사이좋게 자라는 모양을 묘사하며 형제애를 강조한 것이다. 권2는 疏(6), 箚(1), 啓辭(1), 敎書(2)이다. 상소는 경상도 유생이 올린 普雨를 참하라고 청한 22차례의 상소 중 저자가 지은 5개의 상소와 부교리를 사직하는 상소이다. 차자는 1578년 응교로 있을 때 임금의 덕에 대해 올린 글로, 임금의 덕은 겸허하고 공손함을 으뜸으로 해야 하고 교만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계사는 1583년 대사간을 사직하며 올린 것이다. 교서는 盧守愼의 사직을 불허한 비답을 지어 올린 것이다. 권3은 書(3), 雜著(3), 跋(1), 祭文(2), 墓文(1)이다. 1569년에 이황에게 올린 편지는 祭禮에 대해 질문한 것으로 題主를 언제 개정해야 하는지, 小祥 때 별도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질문한 것인데 이황의 답변이 첨부되어 있다. 1570년에 이황에게 올린 편지에는 祭需에 醬을 쓰지 않는 이유, 禫祭에 草玄笠을 쓰는 이유 등에 대한 질의와 답변이 실려 있다. 〈問盧穌齋〉는 盧守愼에게 葬禮와 제례에 대해 질문한 편지로 棺槨 문제와 吉服으로 갈아입는 시기에 대한 저자의 질문과 노수신의 답변이 실려 있다. 〈金日磾殺子論〉은 漢 武帝 때 한나라에 귀화하여 벼슬을 살다가 그 아들이 무제의 弄兒로서 근신하지 않고 宮人과 노닥거렸다는 이유로 자식을 죽인 흉노족 김일제의 행실에 대해 논한 것이다. 〈西行日記〉는 1565년 7월 3일부터 8월 25일 사이의 기록으로 전국의 사림들이 서울에 모여 普雨를 참수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과정을 날짜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발문은 처외조부인 洪彦忠의 「寓庵集」에 대한 것이다. 제문은 李滉과 柳希春에 대한 것이다. 묘문은 장인 洪胤崔의 것이다. 권4는 附錄으로 權相一이 1758년에 지은 行狀, 李埈이 1634년에 지은 墓碣銘, 鄭經世ㆍ權文海ㆍ高尙顔ㆍ吳澐이 지은 輓詞, 金宇顒이 지은 祭文, 李栽가 지은 涑水書院의 奉安文, 李象靖이 지은 復享文, 「南冥師友錄」과 李元禎이 지은 「京山誌」에서 저자에 대한 기록을 발췌해서 실은 것 등이다. 권말에 金汝鎔이 지은 識가 수록되어 있다.
필자 : 김은정(金恩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