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홍씨해봉선생묘역
남양홍씨해봉공종중입향조 해봉선생묘역! | | | 자료방 |
2007.12.09 22:10 |
홍명원선생묘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선조 36년 예조정랑을 거쳐 동부승지 좌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후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민심수습에 힘썼다.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6호
·소 재 지 :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78
·시 대 : 묘 - 인조 1년(1623)
·규 모 : 묘 - 봉분 145×446cm 묘 갈 - 143×64×20cm
[유 래]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 본관은 남양(南陽), 진사(進士) 영필(永弼)의 아들이다.
선조 30년(159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선조 33년 검열(檢閱),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와 사서(司書)·수찬(修撰)·헌납(獻納)이 되었으나 권신(權臣)들을 탄핵하던 끝에 미움을 사서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좌천되었다.
선조 36년(1603) 예조정랑(禮曺正郞)으로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을 겸했고, 그 후 죽주부사(竹州府事)로 죽주산성(竹州山城)을 쌓고 돌아와 수찬(修撰)·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장령 등을 역임했으며 도체찰사(都體察使) 이항복(李恒福)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좌승지(左承旨)를 역임했으며,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 끝에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陞階)되었다.
광해군 7년(1615)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인 해곡(海谷)으로 돌아갔다.
광해군 14년(1622) 광해군 초 후금(後金)과 수교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져 양국 관계가 미묘해지자 급고사(急告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했고, 후금의 위협에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후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힘썼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특히 한대(漢代)의 문장과 당대(唐代)의 시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해봉집(海峯集)》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