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폭우에 관한 장계를 보니, 16, 17일의 비로 도 전체가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석 달 동안 가물어서 거의 흉년이라고 판단되었는데, 이틀 동안의 큰 비로 이어서
큰 흉년이 되었습니다. 물이 빠진 뒤에 날씨가 순조롭다면
혹시 늦게나마 조금의 수확이 있겠지만, 대개 본도의 농사는 더욱 말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백성을 살리는 계책은 오로지 곡물에 있는데,
지금 도내에 남은 곡식으로는 도내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전에 이미 북관(北關)의 교제곡(交濟穀)을 예비하여 왕명을 기다리라는 뜻으로
연석에서 품지(稟旨)하여 행회(行會)하였으니,
이에 대해서는 스스로 선기(先期)하여 정대(整待)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수해를 입은 뒤로는 일전에 비하여 한층 더 심할 터이므로
북관의 곡물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연전에 관동이 재해를 만났을 때 영남의 곡물 4만 석을 옮겨다가 관동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니, 지금 또 관동의 곡물을 옮겨다가 영남 백성들을 구제한다면
서로 도와 주어서 피차에 바꾼 것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더구나 관동은 조금 흉년을 면하여 민력이 조금은 펴이고 있으니,
곡물의 많고 적은 것은 우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먼저 2, 3만 석을 정비(精備)하여 대기하라는 뜻으로 관동의 도신에게 공문을 보내어 신칙하소서.” |